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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권투 복서 챔피언 무하마드 알리 전적과 명언 및 일생

자기개발 세상

by 이루새 2016. 6. 6.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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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영원한 챔피언 무하마드 알리가 74세로 사망했다.우리들 뇌리에 자리잡고 있는 알리의 생을 정리해 보았다.

전적은 통산 56승 5패이다.



“불가능, 그것은 나약한 사람들의 핑계에 불과하다. 불가능,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 하나의 의견일 뿐이다. 불가능, 그것은 도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한다. 불가능,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좋은 답이 생각나지 않으면 침묵이 금이다.”

“나이 오십에 스무 때와 똑같이 세상을 본다면 30년의 삶을 허비한 것이다.”

“말에 책임을 질 수 있다면 허풍이 아니다.”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쏜다.”

“나는 가장 위대한 사람이다. 나는 내가 위대함을 알기 전부터 이 말을 했다.”

“내가 인식할 수 있고 내 마음이 믿는다면 나는 그걸 달성할 수 있다.”

“나는 권투의 우주비행사다. 조 루이스와 잭 뎀프시는 제트기 조종사다. 나는 나 자신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당신이 나만큼 위대해진다면 겸손하기가 어렵다.”

“만약 나를 때리는 걸 꿈꿔 봤다면 각성하고 사과하는 게 낫다.”

“당신을 지치게 하는 것은 올라가야 할 눈앞의 산이 아니라 구두 속의 자갈이다.”

“당신이 좋아하는 것을 위해 싸우는 것을 포기할 때 당신은 패배한 것이다.”




무하마드 알리의 본명은 캐시어스 마셀루스 클레이 주니어이다. 그는 1942년 1월 17일 미국 켄터키주 루이빌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가 살던 곳은 특히 인종차별이 심한 곳이었고, 극심한 차별대우를 받는 가운데, 그는 늘 자기 자신의 존재 이유를 생각했으며, 이것이 자존심 강한 오늘날의 알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12세에 권투를 시작하였고, 어느 날 훈련을 마치고 집에 들어와 라디오 권투 중계방송을 듣던 중 “우리의 헤비급 세계 챔피언, 록키 마르시아노입니다!”라는 말을 듣고(영화 <록키>의 소재가 된 그 경기였다) 알리는 온몸에 전율을 느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뼈를 통과하는 싸늘한 기운을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그 말처럼 나에게 큰 영향을 준 말은 없었습니다.”라고 회고했다고 한다.



1960년 로마 올림픽의 국가대표 선수로 발탁되었고,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알리는 미국의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불량배 두목이 알리의 금메달을 뺏으려고 했던 사건이 있었고, 그들을 물리치고 난 그는 오토바이를 타고 오하이오 강으로 가서, 푸르고 넓고도 흑백을 차별하지 않는 강물에 미련 없이 금메달을 던져버린다. 알리는 새로운 삶을 살리라 결심한다. “내가 로마에서 가졌던 ‘미국을 대표한다’는 환상은 그때 사라졌다고 했다.



이름도‘무하마드 알리’로 개명하고, “나는 알라를 믿고 평화를 믿습니다. 나는 백인 동네로 이사할 생각도 없고, 백인 여자와 혼인할 생각도 없습니다. 내가 택하는 길이 어떤 건지 알고 있고, 무엇이 진실인지도 압니다. 나는 당신들이 원하는 챔피언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라고 공표한다.



그러나 우리가 무하마드 알리를 기억하는 이유는 그의 시련과, 시련 속에서도 꺾이지 않는 신념과, 좌절을 딛고 일어선 끈기와 집념 때문이다.


우리가 알리를 영원한 챔피언으로 생각하는 것은, 알리가 백인사회나 미국이라는 국가 권력에 휘둘리지 않고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최고의 자리를 지켰기 때문이다.


1964년 2월 25일, 미국 플로리다주의 마이애미 비치 컨벤션 홀에서 세계의 영원한 챔피언 알리가 탄생한다.  경기 전 인터뷰에서 그는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겠다”라고 말했고, 20세기 가장 위대한 스타가 탄생하였다.



1967년 4월 28일 알리는 징병위원회로부터 출두하라는 베트남전 파병 명령을 받았으나 거부했다. 그 대가는 너무도 혹독하여, 그는 챔피언 타이틀을 빼앗겼고, 선수 자격정지를 받았으며, 법원에 기소되었다. 법정에서는 5년의 실형을 언도 받았다. 최고 인기를 구가하던 챔피언이 갑자기 운동을 하지 못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운명은 언제나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그에게 실질적인 수입이 없어지자 주위의 사람들도 떠나고, 엘리야 무하마드는 종파의 칙령에 순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종단에서 제명했다.

이후 반전여론 등의 영향으로 무죄 판결을 받는다.


이후 공백기를 거쳐 재기를 한다.

1974년 10월 30일, 막강한 주먹의 혈기방장한 26세의 조지 포먼과 전성기를 보낸 32세의 알리가 자이르의 킨샤사에서 맞붙었다. 그러나 8회에 작렬한 알리의 카운터펀치는 포먼을 조용히 잠재웠다.


알리의 쾌속행진은 계속되었지만, 해가 갈수록 그의 권투인생도 저물어가고 있었다. 무하마드 알리는 이후 1977년까지 타이틀을 지킨다. 1978년 레온 스핑크스에게 타이틀을 뺏겼다가 다시 탈환하지만, 1980년 래리 홈즈에게 지면서 타이틀을 영원히 잃게 되고, 1981년 11월 12일 트레버 버빅과의 경기에서 패배한 것을 끝으로 글러브를 벗는다. 

통산 56승 5패, 20년 동안에 세운 이 기록에는 그 누구의 것과도 다른 시련이 스며 있었다. 또한 시련을 달게 받았던 신념이 함께했기에 알리를 우리는 20세기 최고의 권투선수이자 최고의 스포츠맨으로 추앙하고 있는 것이다. 1987년 권투잡지 <링 매거진>은 알리를 ‘영원한 헤비급 1위 선수’로 선정했고, 1999년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는 ‘20세기의 스포츠맨’으로 선정했다.




1996년 우리는 애틀랜타 올림픽 개막식에서 우리의 챔피언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그는 파킨슨 병에 걸려 거동이 자유롭지 못했지만 성화를 지폈다.


1998년에는 유엔개발계획(UNDP) 친선대사를 지내며 세계 각국에서 구호활동을 펼친 공로를 인정받아, 2005년 독일 UN협회로부터 오토한(Otto Hahn)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그리고 고향 루이빌에 설립한 '무하마드 알리 센터'를 통해 전 세계의 기아ㆍ빈곤 구제와 교육지원사업 등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2016년 6월3일 생을 마감한다.



그는 회고록에서 "챔피언이란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이다. 갈망, 꿈, 비전이 그것이다. 당신은 온 힘을 발휘해야 한다. 당신은 다른 사람보다 더 빨라야 한다. 당신은 기술이 있어야 하고 의지가 있어야 한다. 기술보다 의지가 더 중요하다. 의지가 있는 사람은 앞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다.”


출처 참조 : 네이버 캐스트(차창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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